SK그룹·LG화학, 반도체·고부가 소재 중심 체질 전환 에쓰오일·HD현대, 고효율 설비·스페셜티 사업 강화 기술 장벽 높은 신사업 육성…고수익 대체 사업 집중 정유사는 원료 수직계열화 강점 앞세워 고도화 대응
여수 국가산업단지. 사진=연합뉴스
[빅데이터뉴스 김유승 기자] 글로벌 석유화학 업황의 장기 침체 속에서 국내 주요 기업들이 올해 1분기 일제히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현장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위기감과 사업 재편의 필요성은 여전해 기업들의 생존 전략도 엇갈리고 있다. 전통 석유화학 기업들은 화학 비중을 과감히 줄이고 반도체와 친환경 등 신사업으로 무게추를 옮기는 반면, 정유사들은 대규모 설비투자와 수직계열화를 무기로 석유화학 포트폴리오를 오히려 확대하는 모양새다.
20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전통 화학사들은 기존 범용 제품 중심의 석유화학 사업 체질을 완전히 바꾸거나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분위기다.
현재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는 곳은 SK그룹이다. SK그룹은 울산 지역에 위치한 SK이노베이션과 SKC의 화학 관련 자회사 사업들을 묶어 공동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년 전부터 화학 사업 비중을 줄여온 데 이어 인공지능(AI), 반도체, 에너지솔루션 중심 포트폴리오 확립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셈이다.
핵심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는 자산은 SKC가 쿠웨이트 국영 석유화학사 PIC와 합작해 만든 'SK피아이씨글로벌' 지분이다. 해당 지분을 정리하면 사실상 석유화학 사업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는 수순이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아울러 SK지오센트릭의 일부 플라스틱 관련 자회사까지 매각 대상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LG화학 역시 고부가 전자 소재를 미래 성장의 핵심축으로 삼고 사업 구조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 반도체, 자율주행,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비롯한 고부가 정밀 소재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앞서 LG화학은 연간 1조 원 규모인 전자 소재 사업 매출을 오는 2030년까지 2조 원 규모로 확대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반면 비핵심 자산에 대해서는 과감한 정리를 이어가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8월 에스테틱 사업을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인 VIG파트너스에 2000억 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올해 2월에도 해당 사업과 중국 에스테틱 자회사인 'LG건생과기' 지분 매각을 최종 완료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방안에 참여하며 관련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이처럼 화학사들이 사업 정리와 축소에 방점을 찍은 것과 달리, 정유업계는 오히려 설비 고도화와 스페셜티(고부가 가치 제품) 확대를 통해 석유화학 비중을 키우며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집중하고 있다. 정유 중심의 단조로운 수익 구조에서 벗어나 고도화된 석유화학 연계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복안이다.
에쓰오일이 추진하는 대규모 석유화학 프로젝트인 '샤힌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총 9조 2580억원이 투입되는 이 대형 사업은 국내 석유화학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이는 연간 180만 톤 규모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갖춘 최신 고효율 설비로,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돌입할 예정이다. 샤힌 프로젝트가 가동되면 에쓰오일의 전체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석유화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존 12%에서 25%로 두 배 이상 급증한다. 에쓰오일은 이곳에서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뿐만 아니라 고부가가치 폴리머 제품까지 생산할 예정이다.
HD현대오일뱅크 역시 고도화 설비와 중질유 석유화학 교차시설(HPC)을 앞세워 정유 의존도를 낮추고 체질 전환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구조개편안을 승인한 것을 계기로 고부가가치 중심의 사업 전환에 더욱 고삐를 죄는 분위기다. 기존 정유 사업 비중을 줄이는 대신 석유화학을 비롯해 윤활기유, 카본블랙 등 비정유 사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전략이다. 최근에는 바이오디젤과 지속가능항공유(SAF) 시장 진출에도 집중하며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처럼 양 업계의 생존 방정식이 확연하게 갈린 이유는 각자가 가진 사업 인프라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통 화학사들은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고전 중인 범용 석유화학 제품 시장에 머무르기보다는 수익성이 높은 반도체나 친환경 첨단 소재로 눈을 돌리는 것이 장기적인 이득이라고 판단한다. 기술 진입장벽이 높은 신사업이라는 확실한 대체재가 있어 과감한 출구 전략이 가능한 셈이다.
반면 정유사들은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곧바로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강력한 이점을 갖고 있다. 원료 조달과 다각화가 용이한 만큼, 단순 정유 업황에만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석유화학 고도화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는 중국의 대규모 증설로 시장 환경이 녹록지 않다. 그러나 범용 제품에서 탈피해 기술력이 집약된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고도화에 성공한다면,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술적 우위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다만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처럼 새로 진입하는 초대형 고효율 설비를 두고 업계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글로벌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기존 화학사들이 감산 기조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대규모 신규 물량이 추가되는 만큼, 기존 업체들로서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는 "정부가 국내 석화 설비 규모를 감축하기로 한 것은 내수 기반을 유지하는 선에서 내린 결정"이라며 "만약 석화 산업을 축소하다 내수 시장을 포기하게 된다면, 최근 종량제 봉투나 병원용 일회용품 수급으로 겪었던 혼란이나 과거 요소수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와 관심이 시급하다"며 "에쓰오일 같은 신규 공장의 규모를 무작정 줄이라고 압박하기보다는, 구조재편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비롯해 석유화학 산업계가 고도화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