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1980년대 들어서도 제2차 석유파동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동 국가들의 경제개발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중동 건설 특수도 점차 퇴조하는 징후가 뚜렷해졌다. 더욱이 경제개발을 통해 산업의 기반을 구축한 중동 국가들이 1975년만 해도 2.3%에 불과하던 자국 수주 비중을 30% 이상으로 의무화하면서 중동 건설 특수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건설 인력도 1982년 초에 17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빠르게 감소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해운 시황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1982년 9월경에는 1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화물량이 줄어들어 매출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그 와중에 1980년 9월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중동향 선박의 보험료마저 인상돼 선사들의 수익성은 더욱 악화했다. 중동 정기선 영업에 의존하던 중소 해운사들 가운데에는 부도를 내는 경우도 여럿 생겨났다.
아세아상선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중동향 자재 수송 사업의 영업실적이 급락하는 추이를 보였다. 페르시아만 지역의 배선은 월 1항차로 줄었고 홍해 항로의 배선도 잠정 중단되었다. 그 바람에 중동향 자재 수송의 운임 수입은 1982년 약 1111억 원에서 1983년에는 그 10분에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세아상선은 해운업 불황의 여파로 선박 수주가 급감한 현대중공업의 조업 유지를 위해 신조선 발주를 늘려야 했다. 해상물동량이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선박의 운항을 더 늘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에 아세아상선은 미주 항로 취항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동안에는 타 선사와의 과당경쟁을 피하기 위해 미주 항로 취항을 미루어 왔으나, 이제 어느 정도의 경쟁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다.
아세아상선은 미주 서안(西岸)과 동안(東岸)에 재래 정기선 라인을 먼저 개설하기로 하고 1982년 5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처음으로 ‘A-Line’이라는 영문 CI(Corporate Identity)도 마련했다. 그러자 경쟁 선사들이 운임을 덤핑 수준으로 내렸다가 다시 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아세아상선의 미주 항로 취항을 견제하고 나섰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1982년 8월 1일 아세아12호가 1만3171t의 화물을 싣고 처음으로 미주로 출항했다. 1982년 11월에는 첫 만선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편, 미주 항로 개설을 전후해 아세아상선은 해외영업망을 확대 구축하고 보다 공격적인 영업을 전개했다. 이전의 해외영업망은 1978년 도쿄사무소로 개설해 1979년 4월 지점으로 승격한 도쿄지점이 유일했으나, 1981년 8월 뉴욕사무소를 개설하면서 북미 시장에 대한 영업을 본격화했다.
1982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주재원을 파견했고, 10월에는 캘리포니아에 현지법인 <아세아상선 아메리카(AMM America)>를 설립했다. 또 11월에는 휴스턴에 주재원을 파견하고, 1983년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휴스턴·LA에, 3월에는 포틀랜드, 5월 뉴올리언스, 8월 캐나다 밴쿠버에 각각 지점을 개설해 북미 시장의 영업망을 확대했다. 북미 지역 외에도 1983년 1월 시드니 지점, 4월 런던지점과 자카르타지점, 싱가포르 지점, 9월 타이베이 지점, 1984년 10월 홍콩 지점 등을 차례로 개설해 해외 네트워크를 한층 강화했다.
아세아상선은 미주 항로를 비롯해 재래 정기선의 신규 항로 개설에 나섬과 동시에 컨테이너선 사업 진출을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당시 세계 해운시장은 컨테이너화(Containerization)가 이미 대세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컨테이너화는 대량 수송과 시간의 단축, 하역의 기계화, 그리고 수송 코스트의 절감 등 많은 이점이 있는 수송 체계로, 이미 세계적으로 많은 화물이 컨테이너화하여 운송되는 추세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해운업계의 컨테이너화 수준은 여전히 미미한 단계였다. 그나마도 북미 항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한국 전체 컨테이너 수송 실적의 절반 정도, 특히 국적선사들의 컨테이너 수송 실적의 약 80% 정도가 북미 항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미 항로가 그만큼 교역 비중이 크다는 것이지만, 사실 한국 전체 화물량 가운데 컨테이너 화물의 비중은 1979년 기준으로 13.0%에 머물러 있었다. 미주 항로에서도 국적선사들의 점유율은 겨우 16.5%에 불과했다. 나머지 83.5%의 수출입 화물을 외국 선사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므로 컨테이너 시장 개발의 여지는 매우 큰 편이었다.
하지만 아세아상선의 컨테이너선 사업 진출 계획은 정부의 면허 규제라는 진입장벽에 막혀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1979년에 한국~중남미 항로에서 일본 K-Line의 일부 선복을 빌려 컨테이너 영업을 시작했고, 1981년 7월에는 정기선부에서 한국~페르시아만 항로에 투입되어 있던 아세아3호의 갑판 위에 컨테이너를 싣고 운항하는 서비스를 실행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아세아상선은 다소 늦은 편이었지만 미주 항로 개발을 계기로 컨테이너선 사업에 진출하기로 하고, 우선 벌크와 컨테이너를 동시에 실을 수 있는 현대 콘6(Hyundai Con6)호와 현대 콘(7Hyundai Con7)호, 현대21·22·23호를 잇달아 건조하여 세미 컨테이너선 사업을 시작했다.
세미 컨테이너선 사업도 면허가 없으면 한국에 입항할 수 없었으므로, 아세아상선은 먼저 제3국 간 항로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1982년 10월 현대 콘6호를 일본~미주 서안 항로에 취항했다. 제3국에서 또 다른 제3국으로 운항하는 영업을 선보인 것이다. 12월에는 현대콘7호도 추가로 투입했다. 이에 따라 아세아상선은 미주 항로에 국적선사로는 처음으로 제3국 간 정기항로를 개설하는 선사가 되었다.
한편, 1982년 12월 아세아상선은 미국의 나이키와 운송 계약을 체결하고, 해운항만청으로부터 2만5000DWT(재화중량톤수)급 세미 컨테이너선 2척의 미주 항로 부정기선 운항을 잠정적으로 승인받아 부산항에 입항시켰다. 해운항만청은 한국에서 제조한 나이키 제품의 원활한 수출을 위해 한정 면허를 발급하고 나이키 화물의 적취를 허용했다.
이로써 아세아상선은 극심한 해운업 불황 속에서도 세미 컨테이너선 영업과 제3국 간 영업 등 창의적인 기법을 발휘하여 종합해운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자료: HMM 5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