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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산업시각]청암 박태준이 웃지 못했던 이유

2026-06-09 17:07:24

포항제철 임직원들이 1973년 6월 9일 7시 30분 포항 1고로의 역사적인 고로의 첫 출선을 기뻐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함께 자리한 박태준 사장(가운데)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사진= 포스코
포항제철 임직원들이 1973년 6월 9일 7시 30분 포항 1고로의 역사적인 고로의 첫 출선을 기뻐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함께 자리한 박태준 사장(가운데)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사진= 포스코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1973년 6월 9일 7시 30분, 포항제철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다. 포항 1고로의 출선은 포철의 새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그러나 출선 당시에 찍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사진 속에 나타나 있는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표정이 다른 사람들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동에 젖어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그는 왠지 모르게 자제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서갑경 미국 하와이대학교 명예교수는 생전 박태준 명예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2011년 펴낸 ‘철강왕 박태준 경영 이야기’에서 사진과 관련해 사진의 사연에 대한 박태준 명예회장의 솔직한 속내를 소개했다. 책 속의 내용을 옮겨 왔다.

“박 회장님, 사진 속의 모습이 왜 이렇게 긴장되어 보입니까? 마치 고로의 출선을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1995년 8월 5일 늦은 오후, 필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인터부에서 박태준에게 물었다.

“사진 속의 제 표정을 정확히도 보셨군요.”
그는 멋쩍다는 듯이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제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란스러웠던 제 감정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박태준은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18층에서 금문교에 걸려 있는 태양을 지그시 응시하며 조용히 그날 그 자리에서 느꼈던 감정을 토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포철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어코 쇳물을 만들어냈기에 그 순간은 정말 기쁨에 넘쳤어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쇳물을 정말 사용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우리가 만든 철강 제품을 팔 수 있을 건지 갑자기 걱정되었던 것이지요. 1973년에는 거의 모든 세계 철강업체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가가 하룻밤 새 거의 세 배나 뛰었기 때문에 건설, 자동차, 조선, 화학 및 중장비 산업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이 아주 어려웠지요. 그래서 포철의 장래를 매우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진을 다시 집어 들더니 말을 계속 이어갔다.

“흘러나오는 쇳물을 보니 정말 기뻤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어요. 우리나라에 앞서 제철소를 지으려고 했던 많은 나라들도 중간에서 별수 없이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당시 철강산업의 역사를 보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이었고, 그래서 저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출선 당시에 찍은 그 유명한 사진은 박태준에 대해 많은 것을 발해주고 있었다. 드디어 출선했다는 기쁨의 순간에서조차도 그는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출선은 길고도 험난한 먼 여행에서 첫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했다.

포항 1고로가 첫 출선을 한 지 53년이 흘렀다. 영일만의 기적을 일궈낸 영원한 포철맨 박태준 명예회장은 2011년 별세해 15년이 되었고, 제철보국 확립의 첫걸음이었던 포항 1고로도 가동 48년 만인 2021년 12월 29일 조업을 최종 중단(종풍)했다.

철강산업이 걸어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이들의 목표는 기술 고도화와 생산 증대, 품질 고도화, 원가 절감 등 제조업 본연의 모습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양(量)에 이어 질(質)까지 겸비한 중국 철강산업의 물량 공세에 밀리고 있는 데다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 시장에 이어 인도, 베트남, 중동 등 개발도상국의 통상 견제받으며 수출시장에 이어 내수시장까지 내어주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나마 내수시장은 경기 불황으로 인한 수요 산업 구매 축소의 영향도 받고 있다.

규제를 풀어 기업 활동의 자율을 보장해 달라던 대정부 건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온통 중국산 철강재 수입 규제를 요구해 달라, 업계가 살 수 있게 지원해 달라는 생존 요구가 늘어난다. 수요 산업 불황으로 내수 생산설비 투자 확대는커녕 설비를 폐쇄할 테니 보조금을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산업의 금융화가 철강업계에서도 확산하면서 포스코그룹은 철강 부문에서 자사가 단독으로 투자해 시설을 건설하는 그린필드 투자(Greenfield Investment)는 중단하고 해외 현지 사업자와는 물론 동국제강의 브라질 제철소에 이어 현대제철이 추진하는 미국 전기로 제철소 건설에 지분 투자자로 참여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동국제강그룹도 투자 투자전문 자회서를 설립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서갑경 명예회장과의 인터뷰에서 영일만의 기적의 비결로 가장 먼저 ‘인간’을 꼽안다.

“포철의 기적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요인을 잘 고려한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한국인의 역사, 바람, 기질, 성격 그리고 자존심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한국의 문화와 전통 속에 뿌리를 둔 것이지요. 한국인의 기질은 민감해서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으며 꾀가 많고 외향적인 반면 열심히 일하고 매우 똑똑합니다. 이들의 장단점은 옛부터 내려오는 역사 문화와 유교정신, 수많은 외침에서 받은 영향이 컸지요. 기업 경영자든 군장성이든 정치인이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특성올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종업원들이 자기 일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제품의 품질은 이류로 떨어지고 마무리도 대충대충 하게 됩니다. 생산성이 저하되고 현장에서는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서양에서는 종업원들이 자기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만, 한국에서는 ‘혼’을 불어넣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어 사업 진행 패턴도 바뀌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박태준 명예회장이 말하는 ‘혼’을 불어넣는 기업문화는 시간이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쇠를 만지는 거친 제조업인 ‘철강산업’의 사업 모델이 깨물면 깨지는 사탕도 아닌, 껌이나 캬라멜처럼 말랑말랑해지고 있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든다.

2026년 6월 9일은 제27회 철의 날이다. 이날 오후에 열린 철의 날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은 기쁨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포항 1고로 첫 출선 때 기쁨보다는 앞으로의 걱정에 앞서 굳은 표정을 지었던 박태준 명예회장의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으면 한다. 그가 걱정했던,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른다고 염려했던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위기가 지금 이 시각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자는 말이다.

채명석 빅데이터뉴스 기자 cms@thebig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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