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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50년 돌아보기-24] ‘꿈’을 ‘현실’로 만든 금강산관광 사업

2026-04-26 11:05:31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명예회장 ‘소떼방북’ 계기 금강산 관광 물꼬
사업 다각화 차원서 추진했다 중단했던 크루주사업도 방북 계기 부활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 30분 현대 금강호, 동해항 출항해 첫 방북
그룹 유동성 위기 영향으로 2001년 6월 30일 금강산관광 사업 모두 철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 1차 소때 방북 직접 키운 소 500마리를 북측에 보내기에 앞서 소고삐를 잡고 환송 인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 HMM 50년사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 1차 소때 방북 직접 키운 소 500마리를 북측에 보내기에 앞서 소고삐를 잡고 환송 인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 HMM 50년사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에서 금강산관광은 이산가족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오랜 소망이었다. 실현될 것 같지 않았던 이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창업주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선각자적인 혜안 덕분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남북 경제협력, 특히 금강산관광을 통한 민간 교류라는 원대한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상은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추진 동력을 확보하며 탄력을 받았다. 시기적으로는 외환위기 상황이었지만, 남북 관계는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소 500마리를 몰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다. 방북 직전 임진각에서 “이번 방문이 남북 간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방북 중에 현대는 북한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관광 사업에 합의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같은 해 10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소 501마리를 몰고 2차 방북에 나서 민간 기업인 최초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전 세계인의 관심 속에 ‘소떼 방북’으로도 불렸던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은 남북 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이를 계기로 얼어붙었던 남북의 긴장 관계가 풀리고 경제협력과 민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2차 방북 직후엔 1차 방북 때 합의했던 금강산관광이 실제로 시작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2000년 6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초석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던 현대상선은 1994년 벌크사업본부 산하에 객선영업개발부를 신설하고 크루즈사업 진출을 준비했었다. 1996년 10월에는 세계 최대의 크루즈사인 미국의 카니발과 합작법인 설립에 합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직후 동남아시아에서부터 외환위기가 시작되고 국내 경제도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이유로 카니발이 일방적으로 투자 계획을 파기하고 철수하는 바람에 크루즈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중단되었다.

그런데 1998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을 계기로 금강산관광 사업이 추진되면서 크루즈사업이 되살아났다. 당시 금강산관광은 육로로는 어려워 선박을 운항해야 했으므로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이 주축이 되어 이 사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이에 현대상선은 과거 크루즈사업을 추진할 당시 준비했던 계획과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국제입찰을 통해 그해 8월 두 척의 대형 크루즈선을 확보하여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크루즈선에는 금강산의 4계절 이름 중 봄과 여름의 이름을 붙여 ‘현대 금강호’와 ‘현대 봉래호’로 명명했다. 2만8000DWT(재화중량톤수)급인 현대 금강호는 길이 205.5m, 폭 25.2m, 평균 속도 20노트의 크루즈선으로, 승객 1400명, 승무원 600명이 탑승할 수 있는 규모였다. 또 1만8000DWT급인 현대 봉래호는 길이 171.6m, 폭 24.4m, 속도 18노트로, 승객 888명, 승무원 320명이 탑승할 수 있는 규모였다.

현대상선이 금강산관광을 위해 투입한 크루즈선 ‘현대 금강호’(왼쪽)와 ‘현대 봉래호’ 사진= HMM 50년사
현대상선이 금강산관광을 위해 투입한 크루즈선 ‘현대 금강호’(왼쪽)와 ‘현대 봉래호’ 사진= HMM 50년사

사업 추진을 위해 현대상선은 크루즈사업본부를 신설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사업이다 보니 미비한 점이 너무 많았다. 먼저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한 관련 법률이 없어 운항 면허나 통관 절차 등에 혼란이 극심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전문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현대상선은 그룹 안팎의 관광·호텔 업계에서 인력을 대거 충원하고 교육도 실시했다. 그럼에도 크루즈 운항 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초기에는 일정 기간 스타크루즈에 위탁해 운항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기본적인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한에는 크루즈선이 정박해야 할 장전항(나중에 고성항으로 개명)에 접안시설조차 없었고, 관광객이 이용할 편의시설이나 숙박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 남한의 출항지인 동해항 역시 여객터미널이 없었다.

결국 현대건설이 장비와 인력을 북한으로 보내 장전항 접안시설 공사를 벌였다. 접안시설이 완공된 1999년 10월까지는 외항에 임시 정박시설을 만들고, 거기서부터는 별도의 부속선으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또 육상에 숙박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승객들은 관광을 마친 후 크루즈선으로 되돌아와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추진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의 화해와 교류·협력 증진이라는 국가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 30분 현대 금강호가 동해항을 떠나 처음으로 방북 길에 올랐다. 이로써 현대상선은 온 국민의 열망과도 같았던 금강산관광의 숙원을 이룬 역사적인 기업이 되었다. 금강산관광 사업의 관광객 수는 기반 시설이 미비한 가운데에도 1999년 2월 25일 운항 100일 만에 3만 4000명을 넘어섰다.

금강산관광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부족한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작업도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먼저 1999년 2월 28일 460억 원을 투입해 금강산 온정리에 공연장과 휴게소를 준공했다. 2월에는 금강산관광을 포함해 대북사업 전체를 관장하는 현대아산㈜이 설립되면서 체계적인 대북사업이 가능해졌다. 현대상선은 현대아산에 400억 원을 투자해 최대주주가 되었다.

이어 5월에는 3호선인 현대 풍악호가 취항하면서 금강산관광은 종전의 주 4일 운항에서 매일 운항 체제로 확대되었다. 10월에는 장전항 부두가 완공되어 크루즈선이 직접 부두에 접안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온정각에서 북한 음식 판매가 시작되었다. 11월에는 금강산호텔 맞은편에 온천장도 개장했다.

인프라가 하나둘 갖춰지면서 관광객의 수도 증가했다. 사업 개시 1년 만에 14만 명의 관광객이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밟았고, 2000년 들어서는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화해 분위기가 확산된 데 힘입어 그 수가 더욱 증가했다. 성수기에는 월 2만 명을 넘어섰고, 비수기에도 1만 명 이상의 수요가 이어졌다.

현대상선은 관광상품을 다양하게 세분화하고 요금을 인하한 데 이어,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적극 나섰다. 부산 다대포항에서 출발하는 노선도 신설했다. 늘어나는 관광객의 숙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객실 200실 규모의 해상호텔용 선박을 매입해 ‘호텔 해금강’이라 명명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2001년 1월에는 쾌속선 설봉호가 속초항에서 취항해 항로가 3개로 확대되면서 관광객의 편의도 좋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의 수는 더 이상 늘지 않고 정체 혹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금강산을 둘러보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콘텐츠가 없었던 이유가 컸다.

크루즈사업이 성공하려면 카지노를 비롯해 면세점 등 부대사업과 연계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법률상 북한은 우리 영토로 분류돼 있어 그러한 면허를 취득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상선이 취득한 면허는 내항 부정기 여객운송사업 면허여서 제대로 된 수익사업을 펼칠 수가 없었다.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는 하지만 일부 관광객이 사소한 일로 북한 당국에 억류되거나 1999년 6월에는 서해교전 사태가 발생하는 등 수시로 발생하는 긴장 상황으로 인해 신변에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환경도 변수로 작용했다.

결국 관광객의 수가 감소하고 적자가 누적되면서 크루즈선 운항은 차례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쾌속선을 이용한 관광만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1년 6월 30일 금강산관광 사업 일체를 현대아산에 이양하고 철수했다. 동해항과 속초항에 설치한 여객터미널은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했다.

금강산관광 사업은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왔다. 하지만 당시 현대상선은 다른 사업 부문이 흑자를 내고 있어 사업 자체를 포기할 정도로 적자가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룹 내 일부 계열사들이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이 계열사들의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던 현대상선도 그 영향을 받으면서 더불어 유동성 문제에 직면했다. 결국 채권단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금강산관광 사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현대상선은 최초로 금강산관광을 실현한 기업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만을 남긴 채 금강산과 멀어지게 되었다.

<자료“ HMM 50년사>

채명석 빅데이터뉴스 기자 cms@thebig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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