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 51:49 비율로 출자해 한소해운㈜ 설립 1992년 12월 중국~미주간 부산 환적수송 서비스 개시 1995년 7월 한국~인니 항로 개설, 동남아 시장 강화 1995년 11월 유럽~북미동안 운항 대서양 항로 개설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가운데_가 1991년 7월9일 부산 컨테이너터미널운영공사에서 열린 한~소 직항로 개설 및 본선 취항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샴페인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 HMM 50년사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는 냉전 구도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소련(소비에트연방, 현 러시아)과 외교관계가 없었고 직접적인 해운 교역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국~소련 간 화물은 일본, 홍콩 등을 경유하는 우회 수송으로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고 불리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과도 경제교류를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소 간 인적·경제적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해운 직항로를 개설할 필요성도 증대되었다. 이에 양국은 1989년 3월 모스크바에서 한·소 해운회담을 갖고 논의를 진행하여 한국과 소련 간 직항 항로를 개설한다는 데 합의했다. 한국과 소련의 공식 수교가 1990년 9월에 이루어진 데 비춰보면 수교 이전에 이미 경제·해운 교류의 물꼬를 튼 셈이었다. 항로 개설을 위해 현대상선과 천경해운은 1990년 12월 51:49의 비율로 출자해 한소해운㈜을 설립하고, 현대상선이 대표권을 가지고 항로 개설 준비에 착수했다.
항로 개설을 위한 실무협상에는 현대상선을 비롯하여 한진해운, 고려해운 등 10여 개의 국적 컨테이너 선사들도 참여했다. 다만 실무적인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련 측의 대표권을 가진 FESCO(Far Eastern Shipping Co.), 극동해운공사와 한국 선사들 간에 집하권, 운임 등을 두고 의견이 대립해 항로 개설이 수 차례 연기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별도의 합작회사를 설립해 그 회사에 집하권을 주기로 양측의 의견이 모이면서 비로소 항로 개설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한국 측과 소련의 전소용선공단(Sovfracht)이 51:49로 합작해 자본금 3억 원의 ‘동해해운’을 설립했다.
역사적인 첫 출항은 1991년 7월 9일 이루어졌다. 이날 정부 관계자들과 국내 선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 컨테이너터미널운영공사에서 취항식을 열고 한~소 직항로의 개설을 선언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부산항에서, 소련에서는 보스토치니항에서 각각 화물을 실은 선박이 출항함으로써 비로소 한~소 직항로의 첫 운항이 시작되었다. 최초 북방 항로의 시작이었다.
한~소 직항로는 그 후 한국과 러시아(1991년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으로 재탄생) 간의 교역을 활성화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국과 러시아 간 교역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해운사들이 극동항을 거쳐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현대상선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국가들이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하며 교역량이 급증하는 변화에 주목하고 중국 및 아시아 항로를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중국의 경우, 1992년 12월부터 중국~미주 간 부산 환적 컨테이너 수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어 1993년 1월부터는 부산 환적 중국~유럽 간 서비스도 개시했다. 그동안 상하이~유럽 간에 제공해 온 서비스에서 부산항을 경유하던 루트를 1993년 3월부터는 홍콩항을 경유해 환적하는 루트로 변경함으로써 유럽까지의 운송시간을 단축하는 개선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미주 간 서비스는 싱가포르의 PIL(Pacific International Lines) 외 3개 사가 운항하는 치타공~싱가포르 컨테이너 연결항로를 이용해 주 2편을 배선하고, 롱비치~가오슝 간은 PSW(Pacific Southwest Service, 미주 남서부)선을, 가오슝~싱가포르 간은 AEX(Asia Europe Express, 아시아-북유럽 컨테이너 항로)선을 이용하는 서비스도 개시했다.
이처럼 중국발 미주·유럽향 화물의 삼국 간 서비스를 강화하는 등 중국 지역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자 중국 내 영업조직을 확충할 필요가 커졌다. 이에 현대상선은 1993년 6월과 7월 중국의 다롄(大連)·상하이(上海)·칭다오(靑島)·톈진(天津)에 현지 사무소를 잇달아 개설했다. 1994년 10월에는 베이징(北京)에도 사무소를 개설했다.
1995년 8월에는 100만 달러를 투자해 현지법인 <현대상선중국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중국에서 독자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1995년 9월에는 부산~칭다오~인천 간을 운항하는 제4의 한~중 간 컨테이너 항로를 개설했다.
현대상선은 중국뿐 아니라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역내 개발도상국들의 성장에 주목하고 아시아 항로 확장에도 발 벗고 나섰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급부상한 것은 한국·일본·대만의 주요 생산시설이 이곳으로 대거 옮겨 간 영향이 컸다.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으로 가는 수출 물량이 크게 늘었다.
또 4개 신흥공업국(NICs)으로 불리는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와 일본 등지에서 만든 반제품을 동남아시아로 가져가 조립한 후 미국·유럽으로 수출하는 국가 간 분업화 현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대상선은 아시아 역내에서의 물동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현대상선은 동남아 각국의 물동량을 집하해 미국으로 가는 모선에 환적하기 위한 피더망을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 늘어나는 아시아 물량의 영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1993년 4월 컨테이너아주영업부를 신설해 아시아 항로 영업을 대폭 강화하기도 했다.
1994년 3월에는 피더 서비스 개념을 벗어나 보다 포괄적인 아시아 역내 서비스 체제를 구축하기로 하고, NYK가 운영중이던 일본~방콕 항로에서 선복을 임차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 1995년 7월에는 한국~인도네시아 항로도 새로 개설했다. 이로써 현대상선은 아시아 역내 시장의 기간항로에 모두 진출하여 아시아~미주, 아시아~유럽 항로의 영업력을 강화한 것은 물론 아시아 역내 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컨테이너선사업 진출 이후 우선적으로 미주 항로에 집중해 온 현대상선은 1990년 들어 유럽 시장에도 진출하기로 방향을 잡고, 1990년 5월 시장조사팀을 유럽으로 파견했다. 아시아~유럽 항로는 아시아~미주 항로와 함께 컨테이너선사업의 근간이 되는 매우 중요한 항로였다.
현대상선은 시장조사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의 양대 선사 중 하나인 씨랜드(Sealand)와 협력하여 공동운항하기로 하고, 1992년 4월 계약을 체결했다. 씨랜드는 당시 운항 중이던 2600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급을, 현대상선은 아시아~미주 항로에서 운항 중이던 2800TEU급을 투입하기로 했다.
1991년 말 씨랜드와의 공동운항 일정이 가시화함에 따라 현대상선은 유럽 지역의 영업망 구축에 착수했다. 지점이 아닌 현지법인 조직으로 관할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독일 함부르크에 유럽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1992년 7월 독일 3개 지점을 포함해 현지법인 산하에 6개 사무소를 개설했다. 영국·프랑스 등 8개국과는 대리점 계약을 체결했다.
1992년 8월 18일 현대 익스플로러호가 유럽 컨테이너 항로에 출항하며 AEX로 명명된 아시아~유럽 간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시 유럽 항로는 사실상 공급과잉 상태였지만 현대상선은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업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리하여 유럽 항로 진출 초기인 1993년에 수출화물 4만TEU, 수입화물 3만 4,000TEU를 운송하여 국내 선발선사를 앞지르는 실적을 보였다.
이와 함께 대서양 항로에도 진출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돌입했다. 대서양 항로는 3대 기간 항로 중 하나로, 글로벌 선사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개설이 필수적인 항로였다. 현대상선은 1995년 11월 스위스의 MSC와 제휴하여 유럽~북미동안 간을 운항하는 대서양 항로를 개설했다. 또한 서비스 개시와 동시에 대서양 동맹(TACA, Trans Atlantic Conference Agreement)에 가입했다. TACA는 1994년에 발족한 대서양 횡단 컨테이너선사들의 동맹이다.
이로써 현대상선은 풀컨테이너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아시아~미주, 아시아~유럽, 대서양 등 세계 3대 항로에 모두 취항하는 ‘범세계적 서비스 체제(Round the World Service Network)’를 구축하며 세계적인 컨테이너선사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자료: HMM 5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