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당시 세계 최대 6천CEU급 PCTC선 발주 1996년투입한 '아세안 그레이스호', 대형설비도 운송 세계 최초 자동차 정기선 서비스 개시해 성공시켜 1997년 프랑스에서 KTX 차량 200량 성공적 운송
1997년 11월 현대상선의 6000CEU급 대형 자동차 운반선 ‘아세안 코러스’호에서 프랑스에서 싣고 온 KTX 열차를 하역하고 있다. 사진= HMM 50년사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1993년 현대상선은 4300CEU(Car Equivalent Unit, 자동차 1대를 실을 수 있는 공간, 통산 10㎥)급의 아세안 시리즈 4척을 발주하여 1994년에 차례로 취항시켰다. 다만 수출 시장 다변화 전략에 힘입어 유럽 지역을 향한 자동차 수출 물량이 급증함에 따라 더 많은 수송 능력을 확보해야 했다.
이에 1994년 현대상선은 6000CEU급의 PCTC(Pure Car & Truck Carrier, 자동차와 트럭 전용 운반선) 대형 자동차선 4척을 추가로 발주해 선단 규모를 확대하고자 했다. 이 중 1996년 3월 인도된 첫 선박을 '아세안 그레이스(Asian Grace)호'로 명명하고 극동~유럽 항로에 투입했다. 취항식에는 볼보, 사브(Saab), BMW 등 세계 10여 개국 자동차 관련 화주들이 대거 참석해 현대상선과의 굳건한 파트너십을 보여주었다.
아세안 그레이스호는 길이 193m, 폭 32m, 높이 20m에 1만9005마력의 디젤엔진을 탑재해 평균 시속이 20.1노트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선이었다. 하지만 외형에서 보이는 규모보다도 더 관심을 모은 것은 적재 구조였다. 이 선박은 자동차를 적재하는 데크를 차량의 크기에 따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또 차량을 싣고 내리는 램프 강도를 기존 25t에서 150t으로 대폭 늘려 최대 높이 5m, 중량 150t까지의 차량을 선적 할 수 있게 했다. 말하자면 버스·트럭·중장비·고속철도차량·발전설비·군장비 등 다양한 화물을 선적 할 수 있는 다목적 자동차선인 셈이다.
그해에는 ‘아세안 퍼레이드(Asian Parade)’호와 ‘아세안 레전드(Asian Legend)’호 등 6000CEU급 PCTC선 2척을 추가로 인수해 취항토록 했다.
이 무렵 현대상선은 2000년까지 30척의 자동차선을 신조하고 용선을 늘려 총 89척의 선단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기반으로 세계 최대의 자동차 수송 선사로 도약한다는 포부였다.
이처럼 야심찬 목표에 따라 1997년에는 이전과 같은 종류의 선박 5척을 추가로 발주하는 등 선복 확대를 추진했다.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 수출이 크게 늘고 있고 중국의 자동차 수요도 급증하는 시장 상황을 반영하여 수송 능력을 강화하겠다는 복안이었다.
6000CEU급 신조 자동차선은 1997년에 2척이 인도되었다. 이 가운데 ‘아세안 비전(Asian Vision))’호는 현대상선의 100번째 선박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2척을 포함하여 1997년 말 기준으로 현대상선은 사선 및 용선을 합쳐 총 44척의 자동차선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연간 수송실적도 100만 대를 넘어서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6000CEU급 자동차선은 장기 용선을 포함해 1998년에 3척, 1999년에 3척, 2000년에 1척이 순차적으로 투입되었다. 이로써 6000CEU급 자동차선은 12척에 이르게 되었다.
현대상선은 선복량 확대와 선대 대형화를 추진하는 한편으로 화주를 다양화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한층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며 효율 또한 높은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었다.
일례로, 1996년 2월 스웨덴의 세계적인 자동차회사인 볼보 및 사브와 전용선 계약을 체결하고, 양사가 유럽에서 극동으로 수출하는 승용차·트럭·버스·중장비 등을 수송하기로 했다. 이 계약에 따라 볼보자동차는 연간 3만6000대씩 3년간 11만여 대를, 사브자동차는 연간 6600대씩 3년간 2만여 대를 수송하게 되었다.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에 발주해서 1996년 투입한 당시 세계 최대 6000CEU급 자동차 운반선 ‘아세안 그레이스’호가 항구에 정박해 있다. 사진= HMM 50년사
당시만 해도 국내 선사가 외국의 자동차회사와 전용선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1995년에 오펠자동차를 유럽에서 브라질로 수송한 적은 있지만, 장기 전용선 계약을 체결한 것은 국내 최초로 이루어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선사들이 현대상선의 비즈니스 역량에 대해 높이 평가하곤 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상선은 극동~유럽 항로에 6000CEU급 대형 자동차선을 투입하며 유럽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영업을 강화했다. 그 결과 1997년 1월에는 공개입찰에서 일본·유럽의 자동차 선사들을 제치고 독일의 폭스바겐과 2년간의 전용선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계약에 따라 1997년 1월부터 2년간 폭스바겐의 승용차와 상용차 3만6000대를 수송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자동차 정기선 서비스이다. 현대상선은 볼보 및 사브와 장기 전용수송계약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1996년 3월 1일부터 유럽~동남아·극동 항로에서는 세계 최초로 CAEX(Car Carrier Express Service)라는 주간 정요일 서비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볼보와 사브의 물량을 베이스 카고(Base Cargo)로 삼아 구성한 것으로, 북유럽 지역의 고텐버그예테보리·브레머하펜·앤트워프 등에서 선적되는 유럽 주요 자동차 메이커의 동남아 및 극동향 화물을 집하 대상으로 했다. 더구나 CAEX 서비스는 최소의 트랜짓 타임으로 서비스를 제공하여 화주들의 만족도를 크게 높였다.
현대상선이 자동차 수송에 정기선 서비스를 개설할 때만 해도 대부분의 선사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년 안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1997년에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의 화주를 추가로 확보하는 등 고객을 늘려가며 서비스를 이어가자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성을 중시하는 고급 자동차의 화주들도 주간 정요일 서비스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1997년 현대상선은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KTX 고속철도차량 수송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우리나라의 고속철도 시대를 개막하는 데 일조했다.
고속철도 사업은 1992년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1999년의 시험운행을 앞두고 1997년 9월 고속철도차량 200량에 대한 수송권 입찰이 실시되었다. 고속철도는 프랑스의 TGV에서 도입하는 것으로, 프랑스 라팔리스항에서 고속철도차량을 선적하여 마산항으로 수송하는 대역사였다.
고속철도차량은 기관차의 경우 무게가 70t에 이르고 길이도 24~25m에 달하는 중량물이어서 수송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라팔리스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하여 선적 작업이 가능한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한마디로 다른 일반 화물에 비해 난관이 많은 사업이었다.
현대상선 연도별 자동차선 보유 현황(1995~2002년, 자료= HMM 50년사)
현대상선은 국내외에서 50여 개 선사가 참여하여 치열하게 경쟁한 공개입찰에서 수송 선사로 최종 선정됐다. 대부분의 선사들이 제시한 크레인 방식 대신 마피 트레일러((Mafi Trailer)라는 특별한 방식을 제시한 점, 중량물을 수송할 수 있는 초대형 PCTC를 보유한 점, 자동차 정기선 서비스를 통해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점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마피 트레일러는 가장 안전하고 신속한 수송 방식이라는 평가와 함께 높은 점수를 받는 요소로 작용했다.
1997년 11월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으로부터 6000CEU급 자동차선 1척을 추가로 인수해 ‘아세안 코러스(Asian Chorus)’호로 명명하고 곧바로 KTX 차량 수송에 투입했다. 이후 2척을 추가로 투입해 총 3척의 자동차 수송선을 운항하여 1997년 11월부터 1999년 7월까지 당초 예상보다 2항차 줄어든 10항차 만에 200대의 KTX 차량을 완벽하게 수송했다. 이는 현대상선의 중량물 수송 능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