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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50년 돌아보기-0] HMM 이전의 한국 해운업

2026-03-29 11:38:46

광복 직후 힌국 보유 선박은 784척 6만 7400t 불과,
1949년 해운공사‧조선공사 설립. 6·25 전쟁으로 타격
1960년 ‘선박법’ 등 이어 1967년 ‘해운진흥법’도 제정
해상물동량 급증하며 해운사 늘었으나 영세성 못 벗어나

HMM의 30만DWT(재화중량톤수)급 VLCC(초대형 원유운반선)인 ‘유니버셜 리더(Universal Leader)’호기 항해하고 있다. 정부의 해운재건 정책의 일환으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건조해 2019년 1월 명명식을 갖고 취항했다. 친환경 설비와 고효율 엔진을 탑재했으며, 5척의 동급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인도 선박이다. 이후 유니버셜 아너, 빅터, 스타, 파이오니어호 등이 순차 취항했다. 사진= HMM
HMM의 30만DWT(재화중량톤수)급 VLCC(초대형 원유운반선)인 ‘유니버셜 리더(Universal Leader)’호기 항해하고 있다. 정부의 해운재건 정책의 일환으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건조해 2019년 1월 명명식을 갖고 취항했다. 친환경 설비와 고효율 엔진을 탑재했으며, 5척의 동급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인도 선박이다. 이후 유니버셜 아너, 빅터, 스타, 파이오니어호 등이 순차 취항했다. 사진= HMM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2026년은 국내 최대 해운사인 HMM의 창립 50주년을 맞은 해다. HMM은 이에 맞춰 지나온 50년 여정과 앞으로 나아갈 50년의 미래를 담은 <HMM50년사>를 발간했다. 50년사에서 HMM의 중요한 사건을 발췌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국토의 3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나머지 한 면은 남북 분단으로 인해 통행할 수 없어 사실상 도서 국가와 다름없는 지정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해운업은 대체 불가능한 교역로로서 국가 경제와 산업 발전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일찍부터 해운 역량이 발달해 동북아의 해양 강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역했고 남부지방의 부족국가들은 일본에 철을 수출하거나 우리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장보고가 청해진완도을 거점으로 남해와 서해에서 강고한 해상권을 구축하는 대업을 이루기도 했다.

뛰어난 해운 역량은 고려시대까지도 이어지며 강한 국력의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우수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기반으로 일본과 중국은 물론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인도와도 교역할 만큼 해운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이후에는 원나라와의 육상무역에 치중하느라 해상무역이 크게 위축되며 해상 지배권도 약해졌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일본으로의 조선통신사 파견 외에는 별다른 국제 해운 활동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침체했다. 세곡(稅穀)을 수송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의 경상·전라·충청 지역과 한양을 왕래하는 조운선이 운항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외세에 대응하여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취하는 바람에 해운 활동은 극도로 침체했다.

근대적인 의미의 해운 활동이 시작된 것은 1876년 체결된 강화도조약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주권과 자주적 경제권을 침해당하는 불평등한 조약이었지만, 이 조약에 따라 부산항을 시작으로 원산항1880년, 인천항1884년 등이 순차적으로 개항하며 비로소 외국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또 근대적 기선이 처음으로 도입되고 주요 항만을 중심으로 민간에 의해 소규모의 해운기업이 설립되는 등 비로소 해운업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경제 주권이 일본의 통제 아래 놓이는 바람에 정상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해운업의 구조가 일본인 중심으로 형성되고 일본의 경제적 이익과 대륙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며 기형적인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나마도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과 함께 전시통제 체제로 돌입하고, 1942년에는 ‘국가 총동원령’이 발동되어 100t급 이상의 선박이 모두 징용되는 바람에 해운업의 성장은 사실상 중단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 해운업이 국가 산업의 일부로서 온전하게 그 토대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월 광복을 맞으면서부터이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시 힌극이 보유한 선박은 20t급 이상의 등록화물선 객선기선이 79척 총 6000t 수준, 화물선 576척 총 4만 8300t 수준, 범선 129척 총 1만3100t 수준 등 모두 합쳐 784척6만 7400t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소형이고 노후하여 장거리 운송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부는 해운업의 기반을 구축하고 해운업을 활성화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고 보고, 1949년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1950년에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조선(造船)공장의 62%가 파괴되는 등 막대한 타격을 입는 바람에 해운업 활성화의 꿈은 더욱 요원해졌다.
황폐해진 해운업의 기반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은 1960년대 들어서야 본격화되었다.

정부는 1960년에 ‘선박법’을, 1961년에 ‘선박직원법’과 ‘선박안전법’, ‘한국해운조합법’을 제정·공포하고, 1962년에는 ‘선원법’을, 1963년에는 ‘해상운송사업법’을 잇달아 제정·공포하여 해운업 발전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1967년에는 해운산업의 진흥을 위한 ‘해운진흥법’도 제정·공포했다.

한편으로는 대한선주협회와 한국대형선주협회를 통합한 한국선주협회가 11개 회원사가 참여한 가운데 창립하여 해양 활동 지원에 나섰고, 1961년에는 정부 조직의 개편으로 신설된 교통부가 해운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해운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더욱 속도를 냈다.

1962년부터 5년 단위로 추진된 경제개발계획은 해운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지렛대가 되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공업화와 수출지향의 경제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여기에 불안정하던 국내 정치가 안정을 되찾고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세계 경제가 회복세로 접어든 영향이 더해지면서 우리 경제는 눈부신 성장세를 나타냈다. 이러한 경제성장의 성과가 고스란히 해운업에 활기를 가져다준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의 추진으로 1966년 우리나라 해상물동량은 780만5000t 수출 162만7000t, 수입 617만7000t으로 급증했다. 이 기간에 국적선의

적취율은 1961년 22%에서 1966년에는 29.6%로 늘어났다. 또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년)의 마지막 해인 1971년의 해상물동량은 2972만t 수출 415만5000t, 수입 2556만t으로, 1966년보다 무려 280.8%나 급증했다. 국적선의 운송량도 200% 증가한 694만 9000t수출 146만t, 수입 548만t에 달했다.

이 추세는 197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년)이 마무리된 1976년의 해상물동량은 5093만9,000t 수출 1085만8000t, 수입 4008만1000t으로, 국적선의 운송량은 1971년보다 183.9% 성장한 1973만1000t 수출 440만1000t, 수입 1533만t으로 증가했다.

해상물동량 증가의 영향으로 해운사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1961년 11개 사에 불과했던 외항해운사가 1975년에는 무려 77개 사로 늘어났다.

그러나 영세한 소규모 해운사가 우후죽순으로 신설돼 난립하며 과당경쟁의 조짐을 보인 것은 새로운 문제점이었다. 선사당 평균 보유 총톤수가 1961년 9321t에서 1975년 1만7585t으로 증가하는 데 그칠 만큼 해운사들의 규모는 대체로 초라했다. 이에 정부는 1975년 12월 해상운송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선박운항사업의 면허 기준을 총톤수 1만G/T) 이상, 자본금 또는 자기자금 2억 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에 따라 1976년 말 외항해운사는 65개 사로 정비되었다.
<자료: HMM 50년사>

채명석 빅데이터뉴스 기자 cms@thebig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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