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현대조선 울산조선소 최초로 유조선 수주 원유 파동으로 선주가 인수 거부하자 ‘아세아상선’ 설랍 걸프오일과 협상 끝 석유공사 원유 운송 계약 체결 한국 해운업 최초 국적선에 의한 원유 수송 성사
아세아상선이 1976년 9월 2일 개최한 20만DWT(재화중량톤수)급 VLCC(초대형 원유 운반선) ‘코리아 썬(Korea Sun)’이 취항식 장면. 이 선박은 현대조선이 그리스 리바노스로부터 최초로 수주한 2척의 VLCC 중 2번함인 ‘애틀랜틱 배러니스(Atlantic Barones)’호로 명명했으나 리바노스가 인수를 거부해 법정 갈등 끝에 현대그룹이 소유권을 넘겨받아 이름을 바꾸고 취항했다. 사진= HMM 50년사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은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수출입 규모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서 해상 수송을 위한 선박 수요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조선 능력이 뒤떨어지고 건조 실적도 매우 부진했으므로 국내 수요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도입한 중고선으로 충당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때에 현대그룹은 창업자인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결단으로 울산에 세계적인 규모의 초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정부가 철강·조선 등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함께 국적선에 의한 해상 수송을 모색할 때여서 현대의 조선소 건설 구상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다.
현대는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을 낀 약 35만 평(약 82만6446㎡)을 조선소 부지로 확정했다. 그리고 선진기업과 기술지원 및 판매협정을 체결하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준비에 속도를 냈다. 그러나 8000만 달러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건설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현대는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기로 하고 영국의 바클레이즈(Barclays) 은행을 간사로 하는 국제차관단을 구성했다. 그런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 Export Credit Guarantee Department)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ECGD는 현대가 만든 배를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증명을 가지고 와야 승인을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선박 건조를 발주하는 선주를 미리 확보해 오라는 얘기였다.
현대는 마침 그리스의 선주사인 리바노스가 선단 확장을 추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리바노스와 접촉하여 25만 9000DWT(Dead Weight Ton, 재화중량톤수)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을 신조 공급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덕분에 차관 도입은 무난히 성사되었다.
자금 조달 방안이 확정되자 현대는 1972년 3월 23일 조선소의 기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조선소 건설과 VLCC 건조를 병행하는 유례없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하여, 세계 조선업 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기간에 최소의 비용으로 초대형 조선소를 완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조선소 건설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현대는 추가로 대규모 선박을 잇달아 수주하여 사업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1973년에 23만DWT급 4척과 26만DWT급 4척 등 8척을 수주했고, 1974년에도 26만DWT급 VLCC 2척의 수주에 성공했다. 그 결과 조선소가 완공되기도 전에 현대울산조선소는 총 300만DWT가 넘는 12척의 VLCC를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오른쪽)이 현대울산조선소를 방문한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왼쪽)에게 리바노스가 발주한 VLCC(초대형 원유 운반선)의 건조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현대상선 30년사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현대의 조선사업은 1973년 10월 발생한 제1차 석유파동(Oil Shock)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치솟고 국가 간 교역량이 급감함에 따라 해운시장이 불황에 빠져들고, 덩달아 조선 사업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해운시장의 불황은 조선업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전체 선복량의 40%를 차지하던 유조선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컸다. 유류 소비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 선주들이 앞을 다퉈 유조선을 신조 발주했었는데, 석유파동으로 원유 수입국들이 유류 소비를 강력히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는 바람에 유조선의 선복과잉 현상이 나타나면서 발주를 취소 또는 해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현대울산조선소도 다르지 않았다. 추가 수주가 끊긴 것은 물론이고, 이미 건조한 선박조차도 인수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리바노스는 이해할 수 없는 핑계를 대면서 이미 진수식과 명명식까지 마친 VLCC의 인수를 거부했고, 홍콩의 C.Y.퉁은 한창 건조 중인 2척의 유조선 건조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 이 때문에 3척의 배가 주인을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현대울산조선소의 경영을 시작부터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고심 끝에 정주영 명예회장은 해운 경기가 극심한 침체에 빠진 상황 속에서도 조선소의 가동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일단은 C.Y.퉁이 해약한 2척의 건조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선주가 사라진 3척의 배를 기반으로 수년 전부터 구상해 왔던 해운업에 진출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말하자면 조선 사업의 위기를 신사업 진출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상물동량과 국적선 운송량이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정부도 해운업 육성을 위해 국내화물은 자국선을 이용해야 한다며 ‘국적선 수송률 제고’ 정책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이는 해운업 진출에 유리한 여건으로 판단되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결단에 따라 1976년 초 현대울산조선소 내에 해운회사 설립 준비를 위한 별도의 팀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약 한 달간의 준비를 거쳐 1976년 3월 25일 ‘아세아상선 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설립등기 절차까지 마쳤다. 상호에 ‘현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에 이미 ‘현대’라는 상호를 가진 해운업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2000만 원이었다. 그러나 그즈음 선박운항사업의 면허 기준이 보유선박 1만G/T(총톤수) 이상, 자본금 2억 원 이상으로 강화됨에 따라 한 달 후인 그해 4월 27일 자본금을 2억 원으로 증액했다.
걸프오일의 협상 대상 선박이었던 아시아상선의 25만8300DWT(재화중량톤수)급 VLCC(초대형 원유 운반선) ‘코리아 스타(Korea Star)’호가 항해하고 있다. 이 선박은 홍콩 선주 C.Y. 퉁이 발주한 2척의 동급 VLCC 중 첫 번째 선박으로, C.Y. 퉁이 오일쇼크로 인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한 뒤 계약금을 포기하고 철수하자 정주영 명예회장이 진수를 계속해 아세아상선 선대로 출범시켰다. 사진= HMM 50년사
VLCC 3척으로 해운업을 시작한 아세아상선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선박의 운항을 담보할 원유수송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신생 회사에는 그야말로 명운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당시 국내 정유시장은 호남정유, 대한석유공사, 경인에너지 등 3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유수송권은 모두 외국계 선사가 가지고 있었다. 이 중 호남정유와 경인에너지는 현실적인 이유로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아세아상선은 대한석유공사의 원유수송권을 가진 미국의 걸프오일(Gulf Oil)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했다. 마침 대한석유공사와 걸프오일 사이의 장기 원유수송계약이 1977년 12월로 만료될 예정이어서 걸프오일도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계 7대 석유 메이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거대기업 걸프오일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걸프오일은 대한석유공사의 경영권, 원유공급권, 수송권을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기업이었다. 이러한 석유 메이저를 상대로 신생 해운사가 원유수송권을 따내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발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당시 우리 정부가 국적선의 적취율을 높이기 위해 국적선사에 정책적인 배려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걸프오일에 대한 국내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도 협상에 유리한 요소 중 하나였다.
아세아상선은 1976년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 동안 정주영 명예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정희영 사장이 중심이 되어 협상을 진행했다. 총 15차례나 계속된 지난한 협상 과정에서는 원유 수송의 규모와 운임 수준, 아세아상선의 운항 능력 등 여러 안건에서 의견이 상충하며 협상이 공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세아상선은 과감한 협상력을 발휘하여 1976년 8월 30일 걸프오일과 VLCC 3척에 대해 5년 6개월간의 연속항해용선CVC, Consecutive Voyage Charter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대한석유공사의 원유 해상수송권의 50%를 1982년 6월까지 인정받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해운업 사상 처음으로 국적선에 의한 원유 수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계약체결에 앞서 1976년 7월 30일, 아세아상선의 26만DWT급 VLCC 코리아 썬(Korea Sun)호가 시험운항에 들어갔다. 울산항을 출항해 대만~홍콩~싱가포르를 경유, 말라카 해협~인도 남단~호르무즈해협~페르시아만~쿠웨이트 항으로 이어지는 6469마일의 긴 항로 였다.
시험운항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쿠웨이트항 인근에서는 선진국에서조차 흔치 않았던 26만DWT급의 초대형 신조 유조선을 후진국으로 치부하던 한국의 해운사가 운항한다는 사실에 다수의 도선사들이 놀라워하기도 했다. 시험운항을 통해 한국 해운업의 역량을 과시하는 효과를 본 셈이었다.
그해 11월 23일과 12월 17일에는 그동안 공사를 계속하여 건조 완료한 코리아 스타(Korea Star호)와 코리아 배너(Korea Banner)호가 차례로 취항했다. 이로써 아세아상선이 보유한 유조선 3척이 모두 운항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세아상선은 이 3척의 유조선으로 사업 초기인 1976년 9월부터 1977년 12월까지의 기간에 3330만6000달러에 달하는 운임 수입을 거둬들였다. 이는 그만큼 외화를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자료: HMM 5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