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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협상에도 안심 못한다…정유업계 여전히 '신중 모드'

2026-06-20 09:00:00

미·이란 종전 MOU 타결됐지만... 호르무즈 통행료 여부 촉각
정부 최고가격제 여파 손실 ·담합 수사 등에 여러 악재 겹쳐

앞서 호르무즈를 탈출한 첫 한국 유조선인 '유니버설 위너'호 모습. 사진=연합뉴스
앞서 호르무즈를 탈출한 첫 한국 유조선인 '유니버설 위너'호 모습. 사진=연합뉴스
[빅데이터뉴스 김유승 기자] 미국과 이란이 전격적으로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면서 중동발 공급 충격이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국제유가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유업계는 마냥 반길 수 없는 처지다.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조건에 잠재적 '독소조항'이 포함된 데다, 정부의 최고가격제 손실 보전 갈등, 검찰의 전방위적 유가 담합 수사 등 대내외적 악재가 겹겹이 쌓였기 때문이다.

20일 정유 및 해운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은 3개월 반 동안의 전쟁 끝에 지난 17일 종전 MOU를 체결했다. 포괄적 최종 합의를 위한 세부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으나, MOU 발효 직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활동이 전쟁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에 19일 오전 기준 국제유가도 3% 가까이 하락했다.
그러나 정유업계가 우려하는 부분은 MOU에 명시된 통항 조건이다. 양측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오가는 상선들의 안전한 통항을 위해 '60일 동안에 한해 무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부분에 합의했다.

업계에서는 이 조항이 역설적으로 '60일이 지나면 통행료를 부과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MOU 타결 직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영구적으로 통행료가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으나, 이란 측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앞서 이란 측 협상단 대표였던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은 국영TV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요금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며 주권적 권리를 강조한 바 있다. 이란 의회는 이미 지난 4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주권 확립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외신들은 이란이 향후 배럴당 1달러 수준의 통행료를 부과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 호르무즈 해협의 '유료화'는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국내 정유 4사가 들여오는 원유와 한국가스공사가 수입하는 카타르산 LNG의 대부분이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통상 200만 배럴을 적재하는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한 척을 기준으로 배럴당 1달러의 통행료가 현실화되면, 선박 한 척당 200만 달러(약 30억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해상 운송 비용이 상승하면 정유·석유화학 업계의 원가 부담은 물론, 제조원가와 물류비 전반의 상승으로 이어져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등 국내 주력 수출 산업 전체의 글로벌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

아울러 국내 정유사들이 러·우 전쟁 이후 미국산 등으로 원유 도입선 다변화를 추진해왔으나 이마저도 한계가 명확하다. 한국 정유사의 고도화 설비는 중동의 대표적 유종인 '중질유'에 최적화되어 있다. 미국산 '경질유' 비중을 무리하게 늘릴 경우 기존 석유제품 포트폴리오의 밸런스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정제 시설 자체에 무리를 주게 된다. 설비를 개조하려면 전면적인 공사와 함께 '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투자 비용이 필요해 당장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유사들을 가로막는 장벽은 국내에도 산적해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3월 물가 안정을 위해 도입한 '석유 최고가격제'의 손실 보전 기준을 철저히 '원가중심'으로 확정하면서 정부와 업계 간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정부 고시안은 원유 도입 비용과 판매 비용에 적정 마진을 더해 기존에 편성된 예산 4조 2000억 원 범위 안에서 충분히 보상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정유업계는 원유는 정제 과정을 거쳐 여러 제품이 복합적으로 생산되므로 단일 품목처럼 명확한 원가를 도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반발한다. 특히 최고가격제가 없었다면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MOPS)에 맞춰 수출 등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기회손실'이 보상 범위에서 완전히 배제됐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업계가 추산하는 누적 영업손실 및 기회비용은 최대 5조 원에 달해 정부 예산안과 큰 괴리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사법 리스크까지 정유업계의 목을 죄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정유 4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의 '유가 담합 의혹'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법원이 지난 18일 증거인멸 염려를 이유로 HD현대오일뱅크의 가격결정부서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수사는 나머지 정유사로 확대될 조짐이다. 검찰은 이란 전쟁 전후 유가 급등 과정에서의 가격 담합 의혹뿐만 아니라, 자영 주유소에 자사 물량만 구매하도록 종용한 '전량 구매 계약' 관행까지 유통 지배력 남용 혐의를 수사 선상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올해 1분기 국내 정유 4사가 높은 영업이익을 기록하긴 했으나, 이는 전쟁 이전 저가에 매입해 둔 원유 가치가 상승한 데 따른 '장부상 재고 관련 이익'이 대부분으로 사실상 착시 효과에 가깝다"며 "단기적으로 유가가 급락하면 오히려 대규모 재고 손실을 안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중동 전쟁이 완전히 종료돼 원료 수급 불확실성이 궁극적으로 해소된다면 장기적으로 유가가 안정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위안이 되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김유승 빅데이터뉴스 기자 kys@thebig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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